원고지 1,632장 — 교사노조의 항의를 보며 걸리는 것들

방대한 분량의 원고지 항의문을 상징하는 일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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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이슈 · 교실 너머, 정책의 온도

원고지 1,632장 — 교사노조의 항의를 보며 걸리는 것들

과학교사 한 명이 1년 동안 학교생활기록부에 쓴 글자 수가 32만 6,400자. 200자 원고지로 환산하면 1,632장이다. 이걸 5m짜리 현수막 세 장에 붙여서 사람들을 둘러싸는 퍼포먼스까지 했다. 숫자만 보면 나도 놀랐다. 그런데 이 항의, 곧이곧대로 박수치기엔 걸리는 게 많다.

무슨 일이 있었나

7월 31일, 교사노동조합연맹(교사노조연맹)이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교육부 앞에서 ‘학교생활기록부 전면 개선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발단은 서울시교육청 정기감사였다. 감사원이 2021~2024년 서울 239개 고교 학교생활기록부를 들여다봤더니, 교원 803명이 51명 이상 학생의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세특)에 동일한 내용을 반복 기재한 게 드러났다. 101명 넘게 중복 기재한 교원도 141명, 자기 반 학생 70% 이상에게 똑같은 종합의견을 쓴 담임도 18명 있었다.

팩트체크 — 조사 대상 교원은 1만 5,377명. 51명 이상 중복 기재자 803명은 전체의 5.2%, 101명 이상은 141명으로 0.9%다. 다수가 아니라 소수의 사례지만, 감사원은 서울 전체 고교의 관행으로 지적했다.

교사노조연맹은 이걸 “제도의 실패를 개인의 불성실로 돌리는 구조적 모순”이라고 규정했다. “사실대로 쓰면 민원, 비슷하게 쓰면 복붙 감사, 적게 쓰면 불성실”이라는 발언이 이날 나왔다. 학교생활기록부의 대입 변별 기능을 전면 재검토하고, 장문 서술 의무를 폐지하고, 고교학점제로 늘어난 기록 업무에 맞춰 교원을 늘리라는 게 이들의 요구다. 앞서 23일에는 전교조도 감사원 앞에서 따로 기자회견을 열고 감사 결과 철회를 요구했다.

정부세종청사 전경
교사노조연맹이 기자회견을 연 정부세종청사(교육부) · 사진: Wikimedia Commons (CC BY-SA)
참고 자료
· 경향신문 — 감사원 감사결과 공개 보도 (7/20)
· 파이낸셜뉴스 — 감사원 12건 위법·부당 사항 상세 (7/20)
· 아시아투데이 — 교사노조연맹 교육부 앞 기자회견 (7/31)
감사원(bai.go.kr) 원문 보고서는 사이트가 자동 접근을 막고 있어 직접 링크를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감사원 홈페이지 > 감사결과 > 기관별 감사결과 > 교육자치단체에서 ‘서울특별시교육청 정기감사’로 직접 검색하시면 원문(보도자료·전문 PDF)을 찾으실 수 있습니다.

이 노조, 원래 이렇게 컸나

교사노조연맹은 2017년 서울교사노조와 전국중등교사노조가 연합해 만든 조직이다. 2022년 말 6만 명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10만 명을 훌쩍 넘겨 12만 명대다. 40년 가까이 최대 교원노조 타이틀을 지켜온 전교조(4만 명대에서 정체)를 두 배 넘게 앞질렀고, 노조가 아닌 교총까지 제치고 제1의 교원단체가 됐다. 조합원의 90% 이상이 20~40대라는 점도 특징이다.

2017 2022 · 6만 2026 · 12만 교사노조연맹, 5년 만에 2배 성장 전교조 4만명대 정체 · 교총도 추월 · 20~40대가 90%↑
조합원 규모 성장 추이 그래픽

덩치가 커진 조직은, 존재감을 계속 확인시켜야 한다.

그리고 이 조직은 최근 1년 사이 고교학점제를 계속 걸고넘어졌다. 미이수제 폐지, 국가교육위 재논의 요구, 선택과목 절대평가 전환 요구까지 — 전교조·교총과 공동으로, 때로는 단독으로 여러 차례 목소리를 냈다. 여기에 이번엔 학교생활기록부 글자 수까지 들고나온 걸 보면서, 나는 솔직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직이 커질수록 존재감을 계속 확인시켜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서 현장의 피로감을 세력 결집의 연료로 쓰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 물론 이건 확인된 사실이 아니라 내 추측이다. 다만 고교학점제부터 학교생활기록부까지, 현장 부담이 큰 이슈마다 이 조직이 앞장서 왔다는 흐름 자체는 사실관계로 확인된다.

그런데 이건 진짜 문제다

원고지 1,632장은 과장이 아니다. 초등 6학년 담임 한 명이 25명 학급 기준 한 학기에 써야 하는 평가 기록이 300건, 연간 600건이 넘는다는 증언도 나왔다.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학생기록부 지침이 초·중등 합쳐 40쪽인데, 한국은 학교급별 기재요령만 200쪽씩, 합치면 600쪽에 이른다. 이 격차는 확인 가능한 사실이다.

여기까지는 나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본다. 형식적으로 반복되는 서술, 모든 학생에게 강제되는 장문 기재 같은 건 걷어내야 한다. 사실대로 쓰면 민원이 오고 완곡하게 쓰면 감사에 걸리는 구조라면, 그 구조 자체는 손봐야 맞다.

하지만 “변별력 때문”이라는 반론만으로는 부족하다

학교생활기록부가 이렇게 두꺼워진 이유 중 하나는 학교생활기록부종합전형에서 세특이 사실상 유일한 정성평가 근거로 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교생활기록부종합전형을 둘러싼 오래된 비판 중 하나가 바로 “생기부 허위 작성 및 부풀리기”다. 일부 특목고·자사고 학생들이 낮은 내신에도 같은 대학에 합격하는 사례가 실제로 있고, 여기엔 학교별 세특의 ‘포장’ 수준 차이가 한몫한다는 지적이 꾸준히 나온다. 즉 기록을 줄이자는 논의와 별개로, 잘 쓰는 학교와 그렇지 못한 학교 사이의 격차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그러니까 교사노조가 “대입 변별 기능을 전면 재검토하라”고 요구할 때, 나는 이걸 단순히 “그럼 학교생활기록부를 대입에 안 쓰면 되지 않느냐”는 식으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본다. 변별력이 필요해서 세특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세특이 있으니 변별에 쓰이는 거고, 그 세특을 누가 더 화려하게 포장하느냐의 게임이 되고 있다면 — 문제는 글자 수가 아니라 그 게임의 공정성이다. 글자 수만 줄인다고 이 문제가 풀리진 않는다.

더 멀리 보면

여기서 하나 더 짚고 싶다. 이 논쟁이 결국 왜 이렇게 뜨거운가 하는 근본적인 이유 말이다. 대학 간판이 소득과 불평등을 가르는 가장 큰 통로로 남아 있는 한, 그 간판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학교생활기록부는 앞으로도 계속 중요할 수밖에 없다. 글자 수를 줄이든 늘리든, 이 판 자체가 안 바뀌는 이상 학교생활기록부를 둘러싼 싸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변수가 하나 있다. AI다. 다만 내가 걱정하는 지점은 AI가 포장을 걸러내 주는 쪽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지금도 세특 문장을 AI로 초안 잡는 교사가 늘고 있는데, 이게 본격화되면 “이 기록이 교사가 직접 관찰해서 쓴 건지, AI가 그럴듯하게 만들어낸 건지” 자체를 의심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 지금은 ‘포장을 얼마나 잘하느냐’가 문제였다면, 앞으로는 ‘이게 진짜 쓴 게 맞느냐’는 훨씬 근본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더 먼 미래를 보면, 질문은 아예 달라진다.

AI가 일자리의 판도 자체를 흔들기 시작하면, 그다음 순서는 대학 학위의 가치다. 지금 대학 간판이 소득과 불평등을 가르는 힘은 결국 노동시장이 그 간판을 요구하기 때문에 생기는 건데, AI가 그 노동시장의 규칙을 바꿔버리면 학위의 힘도 예전 같지 않아질 거다. 그리고 학위의 가치가 낮아지면, 그 학위를 따내기 위한 대입 변별력도, 그 변별력을 뒷받침해온 학교생활기록부의 가치도 함께 무너질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의 글자 수 논쟁도 중요하지만, 나는 이 논의가 거기서 멈추지 말고 더 먼 미래까지 함께 내다보면서 이어졌으면 한다.

정리하면 이렇다. 기록 부담이 과하다는 지적, 형식적인 서술을 걷어내자는 요구 — 여기까지는 맞는 말이고 개선이 필요하다. 나도 동의한다.

그런데 조직이 10만 명을 넘기며 최대 교원단체가 된 노조가, 고교학점제에 이어 이번엔 학교생활기록부까지 들고 세를 과시하듯 밀어붙이는 모습에는 경종이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가 힘드니까 하지 말아라”는 떼쓰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화려한 세특으로 ‘포장지’만 바꿔 대학을 잘 보내는 일부 사립·자사고의 관행은, 정작 이번 항의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진짜 개선이 필요한 지점은 업무량 하나가 아니라, 학교생활기록부라는 게임 자체의 공정성이다.

그리고 그 공정성 논의는, 지금의 글자 수 싸움 안에서만 끝나지 않았으면 한다. 대학 간판의 힘이 여전한 지금은 학교생활기록부가 절대적이지만, AI가 판을 흔들고 학위의 가치마저 예전 같지 않은 날이 오면 이 싸움의 전제 자체가 달라진다. 그날을 함께 내다보면서, 지금의 논의도 조금 더 멀리 보고 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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