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정책 · 학교·교육과정 · 교실 너머, 정책의 온도
출석만 하면 학점 준다? 완화인가, 물타기인가
올해부터 고등학교 선택과목은 성적이 어떻든 출석만 3분의 2 이상 채우면 학점을 인정받는다. 언뜻 보면 학생 부담을 덜어주는 좋은 소식 같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듣자마자 떠오른 건, 이 블로그에서 이미 한 번 다뤘던 장면이다. 내신 9등급제를 5등급제로 완화했더니 변별력이 떨어지고 사교육업계가 그 자리에 새로운 불안을 채워 넣던 그 패턴. 이번에도 비슷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이게 정말 학생을 위한 완화일까, 아니면 문제의 본질은 그대로 둔 채 기준선만 낮춘 걸까.
무엇이 바뀌나
교육부는 지난 1월 28일 국가교육위원회의 심의·의결을 거쳐 ‘고교학점제 안착을 위한 지원 대책’을 발표했다. 지난해 고1부터 전면 시행된 고교학점제는 학생이 진로와 적성에 맞춰 과목을 직접 선택하고, 이수 기준에 도달하면 학점을 쌓아 졸업하는 제도다. 기존에는 선택과목도 출석률(3분의 2 이상)과 학업성취율(40% 이상) 두 가지를 모두 충족해야 학점을 인정받았는데, 이번 대책으로 선택과목은 학업성취율 기준이 아예 빠지고 출석률만 채우면 이수로 인정된다. 창의적 체험활동도 ‘고교 3년 총 수업시수의 3분의 2 이상’에서 ‘학년별 수업일수의 3분의 2 이상’으로 기준이 완화됐다. 과목을 이수하지 못한 학생을 위해서는 한국교육개발원의 기존 플랫폼을 개편해 온라인으로 보충 학점을 딸 수 있는 경로도 새로 만든다. 다만 1학년이 듣는 공통과목은 이번에도 출석률과 학업성취율 기준이 그대로 유지된다. 올해는 고1~2학년에, 내년부터는 고1~3학년 전체에 적용된다.
정부는 왜 이렇게 바꿨나
교육부의 설명은 명확하다. 성적이 기준에 못 미치면 ‘최소 성취수준 보장지도’라는 보충 학습을 받아야 하는데, 이 과정이 학생과 학교 모두에게 과도한 부담이 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 부담이 제도의 원래 취지를 갉아먹고 있었다는 점이다. 미이수 부담 때문에 학생들이 정말 듣고 싶은 과목 대신 점수 따기 쉬운 과목을 고르는 ‘선택과목 기피’ 현상이 뚜렷했다. 진로와 적성에 따라 과목을 자유롭게 고르라고 만든 제도가, 정작 성적 부담 때문에 선택을 옥죄는 역설이 벌어진 셈이다. 정부는 이 완화로 학생의 과목 선택권을 실질적으로 넓히고, 온라인학교·공동교육과정 거점학교에 정규교원 777명을 추가 배치해 선택지 자체도 늘리겠다는 계획이다.
교원단체는 “형식적 보완”이라 부른다
그런데 전교조·교사노조·교총 세 교원단체는 대책 발표 당일 나란히 “현장 혼란을 해결하지 못할 형식적 보완”이라는 입장을 냈다. 이들의 핵심 지적은, 정작 문제의 근원인 공통과목에는 학업성취율 기준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2024년 기준 고등학교 기초학력 미달률은 수학이 12.6%에 달하는데, 이미 벌어진 학습 결손을 제대로 다루지 않은 채 선택과목만 손보는 건 곁가지 처방에 가깝다는 얘기다. 앞서 11월 교원 3단체가 교사 4,06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에서는 이보다 더 근본적인 우려가 드러났다. 응답 교사의 90%가 고교학점제로 학생들의 불안과 스트레스가 늘었다고 답했고, 사교육 확대로 인한 격차 심화(87.4%), 미이수제로 인한 학생 낙인과 정서적 위축(83.5%)을 우려하는 응답도 압도적으로 많았다. 학점제 설계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는 “절대평가를 전제해야 학생들이 점수 걱정 없이 원하는 과목을 들을 수 있는데, 상대평가로 바뀌면서 제도 취지가 변질됐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기준을 낮춰서 문제를 없앤 걸까, 아니면 문제를 잠깐 안 보이게만 만든 걸까.
어디서 많이 본 패턴이다
이 흐름, 낯설지가 않다. 내신 9등급제를 5등급제로 완화했을 때도 정부는 “과도한 경쟁을 줄이겠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변별력만 떨어지고 사교육업계는 그 빈자리에 “원점수도 챙겨야 한다”는 새로운 불안을 채워 넣었다. 이번에도 비슷한 우려가 나온다. 학업성취율 기준을 없애면 당장의 미이수 부담은 줄겠지만, 정작 그 과목에서 배워야 할 내용을 제대로 습득했는지 확인할 장치는 함께 사라진다. 한 현장 교사의 표현대로 “유예를 막기 위한 점수 퍼주기”로 흐를 위험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학생과 학교의 행정 부담을 줄이겠다는 방향 자체는 이해한다. 미이수 딱지 하나로 학생이 자존감을 잃거나 자퇴까지 고민하게 된다면, 그건 분명 손봐야 할 부작용이다.
다만 이번 대책이 “선택과목의 기준을 낮추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었다는 점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5등급제 때도, 이번에도, 정부가 택하는 해법은 자꾸 ‘기준 완화’로 수렴한다. 기준을 낮추면 당장의 마찰은 줄어들지만, 그 아래에 깔린 진짜 질문 — 왜 학생들이 이 제도 안에서 이렇게까지 불안해하는가 — 은 다음으로 미뤄질 뿐이다. 교사 10명 중 9명이 학생 불안이 늘었다고 답한 설문 결과는, 이 제도가 손봐야 할 지점이 선택과목 기준 하나가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제도를 만들 때의 좋은 취지가, 현장에서 왜 자꾸 다른 모습으로 변질되는지 —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번 대책이 준 것 같지는 않다. 다음 손질에서는 곁가지가 아니라 뿌리 쪽을 한 번은 제대로 들여다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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